서론: 수치한정발명과 진보성 판단의 이중적 접근법
수치한정발명은 발명의 구성요소 일부를 수치 범위로 한정하는 발명으로서, 공지 기술을 특정 목적에 맞게 개량하는 과정에서 흔히 나타납니다. 이러한 발명의 진보성 판단은 특허법의 핵심 원칙, 즉 ‘비자명적 기술 도약의 보호’와 ‘통상적 최적화 과정의 배제’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문제입니다. 대한민국 대법원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중적인 법리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하나는 선행기술과 과제 및 효과가 유사할 때 적용되는 엄격한 기준인 ‘임계적 의의(Critical Significance)’ 법리이며, 다른 하나는 발명의 착상 자체가 어려운 경우에 적용되는 근본적인 기준인 ‘구성의 곤란성(Difficulty of Constitution)’ 법리입니다. 이 글은 이 두 가지 법리를 중심으로 대법원의 핵심 판례를 개략적으로 소개합니다.
1. 원칙적 기준: ‘임계적 의의’ 법리
‘임계적 의의’ 법리는 수치한정발명이 선행기술과 비교하여 기술적 과제와 효과가 질적으로 동일(동질)하고 단지 수치 범위에서만 차이를 보일 때 적용되는 원칙적이고 엄격한 기준입니다.
자명성의 추정과 입증책임의 전환: 법원은 이러한 경우, 해당 수치 범위는 통상의 기술자가 통상적이고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 쉽게 도출할 수 있는 자명한 것으로 강하게 추정합니다. 이로 인해 실질적으로 특허권자에게 입증책임이 전환됩니다. 특허권자는 자신이 선택한 수치 범위가 단순히 양적으로 개선된 효과를 넘어, 그 범위의 경계를 전후하여 예측 불가능하고 질적으로 다른 ‘현저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점을 증명해야 합니다.
확립 판례 (대법원 2007후1299 판결 등): 대법원은 “한정된 수치 범위 내외에서 이질적이거나 현저한 효과의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 한 진보성이 부정된다”고 판시하여 이 법리를 확립했습니다. 최근 대법원 2023. 7. 13. 선고 2022후10180 판결에서도 장세척 조성물의 특정 성분 함량 범위가 선행기술 대비 현저한 효과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진보성을 부정하며, 이 법리가 여전히 엄격하게 적용됨을 재확인했습니다.
명세서를 통한 입증의무: ‘임계적 의의’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는 반드시 출원 시 제출된 명세서에 기재되어 있어야 합니다. 출원일 이후에 제출된 실험 자료는 원칙적으로 고려되지 않습니다. 명세서에는 청구된 수치 범위의 경계에서 효과가 비선형적으로 급격히 변하는, 이른바 ‘벼랑 끝 효과(cliff-edge effect)’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비교 데이터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청구된 수치 범위의 내부와 외부를 모두 포함하는 비교 실시예를 제시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요건은 발명의 설명이 청구항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특허법 제42조의 ‘뒷받침 요건’과도 직결됩니다.
2. 예외적 경로: ‘구성의 곤란성’ 법리
‘구성의 곤란성’은 특허법 제29조 제2항이 규정하는 진보성 판단의 대원칙으로, 통상의 기술자가 선행기술로부터 해당 발명을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특정 상황에서는 ‘현저한 효과’의 입증 없이도 구성의 곤란성 자체만으로 진보성이 인정될 수 있으며, 이는 ‘임계적 의의’ 법리의 적용이 배제되는 예외적인 경로 역할을 합니다.
이질적인 과제와 효과 (대법원 2008후4998 판결): 대법원은 특허발명이 선행기술과는 상이한 과제를 해결하거나, 선행기술에 개시되지 않은 이질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에는 임계적 의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실제 판결 사안에서, 특정 수치로 한정된 발명은 광출력 향상이라는 공통된 효과 외에, 선행기술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코어 손실 감소’라는 새로운 효과를 달성했습니다. 법원은 이 이질적 효과 자체만으로 구성의 곤란성을 인정하여 진보성을 긍정했습니다.
‘부정적 교시’의 극복 (대법원 2019후12094 판결): 구성의 곤란성을 가장 강력하게 입증하는 경우는 선행기술이 오히려 특허발명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부정적 교시(Negative Teaching)’가 존재하는 경우입니다. 이 판결에서 선행기술은 특정 성분(Li₂O)의 함량이 일정 수치를 초과하면 특성이 나빠지므로 ‘피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기재했습니다. 그러나 특허발명은 오히려 그 경고를 무시하고 훨씬 높은 함량 범위를 청구하여 긍정적인 효과를 얻었습니다. 대법원은 통상의 기술자라면 이러한 명시적인 경고를 따를 것이므로, 이를 극복하고 발명을 완성한 것 자체가 구성의 곤란성을 입증한다고 보아 진보성을 인정했습니다. 이 판결은 ‘효과’의 현저성보다는 ‘기술적 편견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진보성을 판단한 중요한 사례입니다.
3. 통합적 분석 프레임워크 및 실무 전략
수치한정발명의 진보성은 다음의 단계적 모델을 통해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1단계 (과제 비교): 발명의 기술적 과제가 선행기술과 상이한가? (→ ‘예’일 경우, 구성의 곤란성 주장)
2단계 (효과 비교): 발명의 효과가 선행기술 대비 이질적인가? (→ ‘예’일 경우, 2008후4998 판결 법리에 따라 구성의 곤란성 주장)
3단계 (부정적 교시 탐색): 선행기술에 청구된 범위로의 접근을 막는 부정적 교시가 있는가? (→ ‘예’일 경우, 2019후12094 판결 법리에 따라 구성의 곤란성 주장)
4단계 (임계적 의의 시험): 위 1~3단계에 해당하지 않을 경우에만, 명세서에 기재된 비교 데이터를 통해 ‘임계적 의의’를 입증해야 하는 엄격한 시험이 적용됩니다.
이러한 이중적 법리는 특허 출원 및 소송 전략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특허 명세서 작성 전략: 두 법리를 모두 대비하는 ‘양면적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즉, ①’임계적 의의’에 대비하여 청구 범위 내/외부를 포함하는 풍부한 비교 실험 데이터를 제시하고, ②’구성의 곤란성’에 대비하여 선행기술의 한계나 부정적 교시를 명시하고 이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서술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입니다.
특허 소송 전략: 특허권자는 자신의 발명을 ‘단순 최적화’가 아닌 ‘기술적 편견 극복’이나 ‘새로운 문제 해결’의 산물로 주장하여 ‘구성의 곤란성’의 관점에서 심리되도록 변론해야 합니다.
도전자는 반대로 특허발명이 ‘통상적인 최적화’에 불과함을 주장하여, 특허권자를 ‘임계적 의의’라는 좁고 입증이 어려운 틀 안에 가둔 뒤, 명세서 데이터의 불충분함을 공격하는 전략이 유효합니다.
결론
대법원은 수치한정발명의 진보성 판단에 있어 ‘구성의 곤란성’을 일반 원칙으로, ‘임계적 의의’를 특정 상황에 적용되는 예외적이고 엄격한 규칙으로 보는 이중적 접근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발명이 선행기술과 다른 과제를 해결하거나, 이질적 효과를 갖거나, 부정적 교시를 극복하는 등 구성 자체에 곤란성이 인정되면 진보성이 긍정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가 없을 때 비로소 현저한 효과의 입증을 요구하는 임계적 의의 법리가 보충적으로 적용됩니다. 따라서 실무 전문가는 이 두 가지 법리를 모두 이해하고, 각 사안의 사실관계에 맞춰 최적의 논리를 개발하고 증거를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합니다.